일제 강점기 때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북조선로동당의 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조선의 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월 9일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소련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을 설득해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국군과 UN군이 협력하여 반격하자 중국공산당 지원군의 도움으로 휴전을 하고 한반도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후 로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파 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어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주체리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3]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7월 8일 사망, 1998년에 개정된 김일성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을 호칭할 때에는 그 이름 앞에 최상의 수식어, 최상의 경어를 붙여야 하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 "어버이 수령님", "아버지 장군님"으로 호칭한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4][5] 또는 金聖柱[6][7][8])이고, 만주 빨치산 시절인 1938년 무렵부터 이후 소련군 시절 8.15 해방때까지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된다.[9]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김일성 아닌 중국 발음 진지첸(진르청, Jīn Rìchéng)으로 읽었으며, 러시아어로 된 소련군 문서에도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혀 있다.[10][11][12][13] 해방 직후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을 쓰다가,[14] 10월 14일 대중 앞에 김일성(金日成)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 나섰다.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15] 의혹과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논란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